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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흑사병 사망자 수 치사율 치료제

중국과 아울러서 아시아 내륙에서 유래한 흑사병은 1347년 킵차크 군대가 크림에서 제노바 교역소를 포위한 뒤에, 페스트 환자의 시체들을 노포(弩砲)로 도시를 향해 쏘아보냄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전파되답니다. 흑사병은 지중해 항구들로부터 퍼져나가 1347년 시칠리아와 아울러서 지난 1348년 북아프리카·이탈리아·스페인·영국·프랑스, 1349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위스, 독일, 베넬룩스 3국, 1350년 스칸디나비아와 발트 해의 국가들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흑사병은 1361~63, 1369~71, 1374~75, 1390, 1400, 1664~65년에 다시 유행했으며, 치사율은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밀라노 공국, 플랑드르, 베른 같은 지역에서는 비교적 피해가 적었으나 토스카나·아라곤·카탈루냐·랑그도크 같은 지역에서는 그 피해가 심했습니다. 도시는 전염의 위험성이 더 높았기 때문에 농촌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도시 내에서는 수도원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당시의 문헌 연구에 따르면, 치사율은 지역에 따라 인구의 1/8~2/3 정도에 이르렀답니다.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가 유럽 인구의 1/3 정도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한 말은 비교적 정확할 것입니다. 1400년 영국 인구는 1300년 인구의 절반 가량이었으며, 영국에서만도 약 1,000개의 마을에서 인구가 감소했거나 마을 전체가 사라졌습니다. 대략적으로 추산해보면, 그당시 유럽에서 2,500만 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답니다. 서유럽의 인구는 16세기가 되어서야 1348년 이전 수준을 회복했습니다. 1664~65년에는 런던에서 크게 유행하여 46만 명의 인구 중 7만 명이 사망했답니다.

 

중국의 광둥[廣東] 지방과 홍콩에서는 1894년에 사망자수가 8만~10만 명에 달했고, 그 이후 20년 동안 중국 남부지역의 항구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가 모두 1,000만 명이 사망했답니다. 이 무서운 재난은 많은 결과를 낳았는데 전쟁이 중단되고 무역의 갑작스러운 부진이 따르기는 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답니다. 더 지속적이고 심각한 결과는 경작지가 급속히 줄어든 것이었는데, 이는 많은 노동자들이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결과 많은 지주들이 파산했으며, 노동력의 부족으로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노동력을 집세로 대신하거나 임금을 주어야만 했고 기술자와 소작농의 임금도 상승했답니다.